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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32. <부정공>귀서공휘병주행략(龜捿公諱秉周行略)
1. 문헌 목록 〉21. 21世 〉34. <부정공>경암공휘병헌묘갈명(警菴公諱秉憲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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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부정공>송파공휘병선행장(松坡公諱秉善行狀)
松坡公諱秉善行狀 公姓趙諱秉善字源汝松坡其號也系出玉川高麗檢校門下待中諱璋爲鼻相其後有名宦碩德著于世三傳而至諱元吉諡忠獻號農隱麗季五隱之一也以恭讓朝定策勳受爲玉川府院君生諱瑜號虔谷官典農寺副正麗運訖自靖不任退老于順天之冨有縣 太宗除漢城判尹不就 世宗命旌其家副正生諱斯文崇文昆季聯璧長左軍司正 贈吏曹參議季兵使 贈兵曹判書諡節愍子 贈童蒙敎官當 端廟六臣之禍兵使公與其子哲山騈命焉何其烈也兵使公於梅竹爲姑夫故禍莫憯焉父子並蒙棹楔之恩腏享於 莊陵壇士林立祠於謙川春秋爼豆之其後至別提諱晋老無育以參議后進士時述孫琯子之曾祖諱弘淳祖諱在壽考諱泰錫皆有隱德秘耽津崔氏洙擎女公以 純祖丙戌十一月十三日生幼而頴悟不與群我伍孝友根天敬以奉上恩以御下門庭之内斬斬如也性度坦然不設涯岸接人樂易慈良皆得其歡心焉家貧雖不得專意讀書少有暇輒誦小學大學濂洛朱門要訣繫蒙要訣等諸篇以故澡躬制行求其不合於是者盖寡矣甲寅大水嚙者爲川吐者爲岸如干所有土盡歸烏有自此家貲益蕩焉翌年春始墾役畚鍤堰堤之勞皆躬焉凡四閱月而復其土或以勞公公答曰非此吾父母朝夕之供無以爲矣自後縮絲節粒産業稍裕於養親奉祭始無憾焉兄弟三人公序居一仲弟秉敎性嗜酒不以家爲事生計日益冷落先是兄弟醵金爲契名曰湛樂盖爲奉先敎子緩急之用也秉敎稍有欠通未還公論之曰置契本欲全其湛樂若因此而傷恩安用貨爲折券而竟不問焉娶其子嫁其女無異己出又割田而與之秉敎化之卒爲可士耳與季弟秉憲友愛尤篤終日湛翁議論服習不出孝友敦睦而及其倦也或對基局務以式好不以勝負爲意而妹有爲金在廷妻者早寡無嗣公二時哀恤之爲其系子擇婦配之當丙子大無之年遠近知舊族戚待而沃釜者不算戊子又如之輕財好施多此類也崔孺人以年老得疾數年彌留矢溺不擇穢殠徹外人皆掩鼻公躬自洗栻不委於人曰古人嘗之此事猶甘公之至誠竟爲回天癸酉丁外憂哀毀遂禮其年八月葬于乾川後麓三年拜墓殆無虛日矣少時累試場屋數奇不諧親沒之後絶意進取曰曩年之擧爲親屈也遂遯跡林樊以爲畢生計聞友人李極緒坐非竄黃海道長連作詩寄之曰覆盆難照日囂市易蒙塵可憐千里客横被罪名人一日公得奇疾醫治無驗病中常曰此身不足惜其如吾九耋老母何病勢日益沉綿臨終呼家人爲不了語曰善養吾母一如吾在時也吾千壤間罪人死何瞑目遂泫然含冤而逝即 高宗癸巳十一月十七日也春秋六十八歲年甲午正月二十九日葬于谷城琛來洞負卯原配濟州梁氏學圃彭孫后聖海其考也甚有婦德善事尊嫜與君子無違公之至行内助居多云享年八十一後公十二年乙巳九月二十三日卒穿公塋合封焉生二男三女男大燮龜燮女適南原尹秉玟海州鄭完錫朔寧崔炳鎭大燮始聘竹山朴奎瀅女繼配延安李炳寬女生四男四女男重九重台女盧林壽妻朴氏出重鏶重稷盧湜鉉金在澤梁友承妻李氏出重九娶朔寧崔遇璟女太虛亭恆后重台娶善山柳重基女眉巖文節公希春后重九男湜會重台男翊會綰會龜燮始聘星主李鍾奭女繼聘昌寧曺榮基女生四男三女男重虞重龍女金容圭崔成海妻李氏出午龍乙龍曺氏出女幼餘不盡錄相基年少未嘗覿德然而公之季弟警菴公於余辱知最久故公之美行茂跡聞之稔矣且重九與余契最密一日重九携其大人所爲家狀屬余述之辭不獲己姑次其梗槩如右 善山 柳相基 識 송파공휘병선행장(松坡公諱秉善行狀) 공의 성(姓)은 조씨(趙氏), 휘는 병선(秉善), 자(字)는 원여(源汝)이고, 송파(松坡)는 그의 호(號)이다. 옥천(玉川)이 관인 그는 고려(高麗)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장(璋) 이 시조이다. 그 뒤 명환(名宦), 석덕(碩德)한 이가 있었고, 三전하여 원길(元吉)은 시(諡) 충헌(忠獻) 호(號) 농은(農隱)인데 고려말 五은(五隱)의 한사람으로 공양왕조(恭讓王朝)에 공(功)이 있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封)해졌고, 그가 낳은 유(瑜)는 호(號) 건곡(虔谷), 관(官)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인데 고려운세가 다 되자 벼슬을 버리고 순천(順天)땅 부유현(富有縣)으로 물러가 태종(太宗)이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해도 나가지 않자 세종(世宗)이 그 집안에다 정여(旌閭)를 내려주었다. 부정(副正)이 사문(斯文), 숭문(崇文)을 낳았는데, 그들 형제는 나란히 벼슬을 하여, 사문(斯文)은 좌군사정(左軍司正) 증(贈) 이조참의(吏曹參議)였고, 그의 아들 증(贈) 동몽교관(童蒙敎官)과 함께 단종(端宗)때 육신의화(六臣之禍)를 만났다. 이에 병사(兵使)공이 교관인 그의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몸을 바쳤다. 어찌 그리 충직하였을까? 병사공이 성매죽헌(成梅竹軒)에게 고부(姑夫)가 되는 까닭에 이와 같은 화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부자가 모두 정려의 은혜를 받고 장릉단(莊陵壇)에 배향되었으며 선비들이 겸천사(謙川祠)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별제(別提)를 지낸 진로(晋老)가 아들이 없어 참의공(參議公) 후손 진사(進士) 시술(時述)의 손자 관(琯)으로 양자를 하였다. 증조(曾祖)는 홍순(弘淳) 조(祖)는 재수(在壽) 고(考)는 태석(泰錫)인데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고, 비(妣)는 탐진최씨(耽津崔氏) 수경(洙擎)의 딸이었다. 공은 순조병술(純祖丙戌) 十一월 十三일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 아들과는 어울이지 않았으며, 천성이 효우에 뿌리를 내려 윗사람을 모실때는 공경으로, 아랫 사람을 부릴때는 은혜로 하여 온 집안이 참신하였고, 성격이 활달하고 꾸밈이 없으며 남을 대할때 낙이자양(樂易慈良)하게 하여 많은 환심을 얻었다. 집이 가난하여 꾸준히 글만 읽지는 못했으나 조금이라도 여가만 있으면 소학(小學)·대학(大學)·염락(濂洛)·주문요결(朱門要訣)·격몽요결(擊蒙要訣)과 같은 책을 읽었다. 이 때문에 조궁제행(澡躬制行) 하는데 있어 이와 걸맞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갑인(甲寅)년에 큰 물이 들어 낮은 곳은 잠겨 버리고 높은 곳만 겨우 남아 얼마 안되는 토지마저 모두 떠내려가 버리니 이때부터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웠다. 그 이듬해 봄, 개간을 시작하여 제방 쌓는 일등을 몸소하여 四개월만에 그 땅을, 복구하니 어떤 사람은 대단하다고 칭찬했지만 공은, 『이땅이 아니면 부모의 조석봉양마저 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라고 말 할 뿐이었다. 그뒤로 계속 절약하여 살림이 점점 넉넉해지니 부모봉양과 선영 봉사에 서운한 감이 없게 되었다. 三형제 중에 공은 장남(長男)이었다. 중제(仲弟) 병교(秉敎)가 술을 좋아하여 집을 돌보지 않으므로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형제들이 돈을 거두어 선영을 받들고 자손을 가르치는데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담락(湛樂)이란 계(契)를 만들었다. 그런데 병교가 약간의 돈을 가져간 뒤 갚지 않자 공이 말하기를, 『계를 모은 것은 원래 형제간의 담락을 온전히 하기 위함인데 만일 이로 인해 은혜를 상한다면, 돈은 모아 뭐하는데 쓰겠는가?』 하고 문서를 없애버리고 불문에 부쳐버렸다. 또 그의 아들딸, 시집장가 보낼 때에도 공은 자기 자식처럼 여겼을 뿐만 아니라 토지마저 나누어주니 병교가 감화되어 마침내 옳은 선비가 되었다. 끝동생 병헌(秉憲)과도 우애하여 하루 종일 효우(孝友) 돈목(敦睦)에 관한 의논을 하다가 싫증이 나면 바둑을 두기도 했지만 여기에서도 식호(式好)에만 힘썼을 뿐 승부(勝負)는 따지지 않았다. 김재정(金在廷)의 처가된 누이동생이 일찍 과부가 되어 아들이 없었다. 공은 이를 가엽게 여겨 그의 양자를 장가까지 보내 주었으며, 병자(丙子)년에 흉년이 들어 생활이 곤란해지자 멀고 가까운 지구(知舊) 족척(族戚)에게 기름진 음식으로 대접해 주었고 무자(戊子)년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와같이 그는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최유인(崔孺人)이 늙은 나이로 병을 얻어 여러해 동안 고생하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악취가 밖에까지 나므로 사람마다 코를 가릴 지경이었으나, 공은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몸소 세탁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상분(嘗糞)까지 했다는데, 이정도 일이야……』 라고 하더니 공의 지성이 마침내 하늘을 감동케 했던 것이다. 계유(癸酉)년 부친의 상을 당하여 예에 넘도록 슬퍼하였고 그해 八월에 건천(乾川) 뒷산에다 장사지내고 三년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배묘(拜墓)하였다. 공은 젊었을 때 여러번 과거를 보았지만 수가 나빠 오르지 못했는데 어버이 세상을 뜬 뒤로 진취(進取)할 뜻을 버리고 말하기를, 『지난날 과거보려 한 것은 어버이를 위하여 뜻을 굽힌 것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임천에 묻혀 한평생 지낼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벗 이극서(李極緒)가 횡액(横厄)에 걸려 황해도(黃海道) 장연(長淵)으로 귀양간다는 말을 듣고, 엎어진 동이 밑엔 햇볕 들기 어렵고, 覆盆難照日 시끄러운 시장가엔 먼지 쓰기 쉽나니! 囂市易蒙塵 천리에 가련한 손아! 可憐千里客 그릇 죄명을 입었구려…… 横被罪名人 란 시(詩)를 지어 보냈다. 하루는 공이 이상한 병을 얻어 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 병중에 항상 하는 말이 『내 몸은 아깝지 않지만 九十된 노모(老母)를 어이할고!』 라 하였다. 병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임종시에 집사람을 불러, 『어머니 모시기를 내 생전과 같이 하라! 나는 천지에 죄인이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 하고 말을 마치지 못한 채 눈물 어린 모습으로 숨을 거두니, 그날이 곧 고종계사(高宗癸巳) 十一월 十七일이었고, 나이는 六十八이었다. 그 이듬해인 갑오(甲午) 一월 二十九일에 곡성(谷城) 침래동(琛來洞) 묘원(卯原)에 장사지냈고, 그의 부인은 제주양씨(濟州梁氏) 학포(學圃) 팽손(彭孫)의 후예(後裔)인 성해(聖海)의 딸로 부덕(婦德)을 갖추어 시부모를 남편과 다를바 없이 섬겼고 공의 지극한 행실에도 많은 내조를 하였다. 공보다 十二년 뒤인 을사(乙巳) 九월 二十三일에 八十一세로 세상을 떠 공과 합조하였다. 이남삼녀(二男三女)를 두었는데 아들은 대섭(大燮)·귀섭(龜燮)이고 딸은 남원(南原) 윤병민(尹秉玟)·해주(海州) 정완석(鄭完錫)·삭녕(朔寧) 최병진(崔炳鎭)에게 출가했다. 대섭(大燮)은 처음 죽산(竹山) 박규영(朴奎瀅)의 딸에게 장가들고, 다음 연안(延安) 이병관(李炳寬)의 딸에게 장가들어 四남四녀를 낳았는데, 아들 중구(重九)·중태(重台)와 딸 노임수(盧林壽) 처는 박씨가 낳았고, 중집(重鏶)·중직(重稷)과 노식현(盧湜鉉)·김재택(金在澤)·양우승(梁友承) 처는 이씨가 낳았다. 중구(重九)는 삭녕(朔寧) 최우경(崔遇璟) 딸에게 장가들고, 중태(重台)는 선산(善山) 유중기(柳重基) 딸에게 장가들었다. 중구(重九)의 아들은 식회(湜會), 중태(重台)의 아들은 익회(翊會)·관회(綰會)였다. 귀섭(龜燮)은 처음 성주(星主) 이종석(李鍾奭) 딸에게 장가들고 그뒤 창녕(昌寧) 조영기(曺榮基) 딸에게 장가들어 四남三녀를 두었다. 중우(重虞)·중룡(重龍) 김용규(金容圭) 처·최성해(崔成海) 처는 이씨가 낳고, 오룡(午龍)·을룡(乙龍)은 조씨가 낳았다. 그 다음은 어리므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 어려 직접 공을 뵙지는 못했으나, 공의 막내 아우 경암공(警菴公)과 오래 전부터알던 터라 공의 미행무적(美行茂跡)을 익히 들어왔으며, 또 중구(重九)는 나와 가장 친한 벗이라. 하루는 중구가 그의 선대인(先大人) 가장(家狀)을 들고와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기에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이와같이 대강 쓴다. 善山 柳相基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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